이정록 LEE JEONG-LOK [THE ORIGIN OF ENERGY] 展 2020년 02월 14일(금) - 03월 08일(일) 갤러리나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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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슬란드에서 완성한 살아있는 땅 Iceland는 불과 얼음의 섬이다. 지표면 아래에서 들끓는 용암의 뜨거움 입김과 지표면 위 거대한 빙하가 내뿜는 찬기운이 하루에도 수차례 뒤엉킨다. 극과 극의 에너지가 격렬하게 부딪히는 땅, Iceland와 이정록과의 만남은 숙명 같은 것이 아닐까? 그는 땅 자체의 에너지가 강렬하고 거대해서 종교 이전의 것, 인간 이전의 始原에서 우주가 품고 있는 강렬한 에너지 자체로 인간이 자연에게 압도당하는 상황안에서 직접적인 소통을 한 것이다. “그 압도의 느낌은 뭘까?” 라는 의문에 답을 찾아가는 이정록의 작업은 아무런 빛이 없는 깜깜한 밤 즉 빛이 사라진 시간에 맨몸으로 원시적 자연이 갖는 거대한 에너지와 부딪치며 직접적인 소통을 한다. 시각적 요소들이 모두 사라진 밤에 촬영을 하게 되는 그의 작업 현장은 그곳의 내재된 격렬한 에너지를 오로지 그만의 빛으로 시각화 하는 것이다. 그의 촬영 행위는, 숭고함 마저 깃든, 그의 영적인 기운과 원시의 진동하는 에너지가 관통하는 자리인 셈이다. “내가 작업을 이끌어 내는 것이 아니라 작업이 나를 이끌었다” 라고 작가는 고백한다 그의 많은 작업들은 다시는 불가능한 즉 두 번 다시 찍을 수 없는 그날의 빛 공기감, 영혼의 교감 등 그의 내적인 요소들과의 완벽한 혼합을 통해 얻어진 것들이다. 산티아고 작업이 기도와 명상, 그리고 종교적인 그리고 여성적인 느낌의 작품이라면 이번 작업은 작가의 이제까지의 작업과는 다른 이정록이 새로운 차원의 문을 여는 작업이다. 그는 “거대한 새로운 문 앞에 선 심정”으로 조심스럽게 새로운 작업의 방향을 제시하는 자리인 셈이다. 나는 |
백야의 섬에서 춤추는 헤르메스적 섬광
백종옥(미술생태연구소장)
수천 년 동안 하얗게 얼어붙어 있는 빙하, 그 거대한 얼음덩어리들의 일부가 녹으며 수직으로 쏟아지는 폭포, 거세게 흘러내리는 물줄기 때문에 흔적없이 사라져버린 길들, 끊임없이 끓어오르는 분화구, 그 주변에서 일렁이는 뜨거운 흙덩어리와 치솟는 수증기, 오래전 굳어버린 용암 지대 위를 오랜 세월 뒤덮고 있는 이끼들, 어둠이 깔리지 않는 백야의 하늘, 그 하늘 아래로 펼쳐진 거친 바위산과 골짜기 그리고 푸른 빛이 감도는 강과 호수……, 지상의 빙하가 내뿜는 냉기와 지표면 아래의 마그마가 토해내는 열기가 격렬히 충돌하며 공존하는 그곳엔 음양이 분리되기 전의 태초처럼 거대한 혼돈의 에너지가 뒤엉켜 펄떡이고 있었다. 입문식을 치르듯 긴 여정을 통과한 끝에 그 풍경을 마주한 예술가는 최초의 자연을 발견한 인간처럼 경외감에 전율했다. 그리고 미처 명상에 잠길 겨를도 없이 밀려드는 야생의 에너지에 몸을 내맡길 수밖에 없었다. 그 미지의 에너지는 그가 험준한 바위산을 힘겹게 오르내리고, 가파른 절벽의 협소한 길을 위태롭게 걷고, 차가운 물보라가 날리는 폭포수에 뛰어들고, 뜨거운 수증기와 세찬 바람을 몸으로 이겨내며 쉼 없이 빛을 터트리도록 이끌었다. 그가 터트린 작은 섬광들은 소립자처럼 명멸하며 광활한 자연 속에서 춤을 추었다. 나비와 기호 형태의 빛들은 무리를 지었다가 때로 뿔뿔이 흩어지기도 했고, 구불구불한 띠를 이루다가 위로 치솟기도 했다. 그는 날마다 시시각각 변하는 하늘과 땅과 물을 예민하게 관찰하며 차 안에서 웅크린 채 눈을 붙이다가 또 다시 휘몰아치는 에너지와 빛의 길을 따라갔다. 그토록 밀도 높은 고투의 과정은 고스란히 화면에 응축되어 이제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이정록 작가의 새로운 사진 작품들은 그렇게 태어났다.
빙하와 화산의 섬, 아이슬란드. 왜 이정록 작가는 그곳에 갔을까? 그것은 지난해 그때까지 해왔던 작업을 되돌아보며 자신이 추구하는 예술 세계의 방향성을 다시 가늠해본 결과였다. 그에겐 그만의 예술 세계를 관통하는 오래된 화두가 있다. 물질과 에너지로 구성된 이 우주에서 눈에 보이지 않지만 작가에게 감지되는 에너지의 세계를 시각화하겠다는 생각이 그것이다. 그 생각의 뿌리는 2006년부터 시작된 <신화적 풍경> 연작에 있다. 특정한 장소들을 영적인 느낌이 강한 풍경으로 해석한 이 연작 중엔 빛을 발산하는 나무가 등장한다. 이 나무의 모습은 그의 체험에서 비롯되었다. 나무의 영혼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어느 날 전북 고창에서 감나무를 촬영하고 있었는데, 그의 눈에 마른 나뭇가지 끝에서 꿈틀거리며 발산하는 생명의 에너지가 생생히 보였던 것이다. 이때의 초감각적인 체험은 마치 계시처럼 그에게 깊이 각인되었다. 그는 플래시라이트를 이용해 나뭇가지 끝의 신령한 에너지를 표현하려고 노력했다. 세계 도처의 신화에서 숭고한 이미지로 등장하는 빛이야말로 원초적인 생명성을 담아내기에 적합한 매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렇게 빛을 이용한 작업 방식은 2009년부터 본격적으로 <생명나무> 연작으로 발전하면서 이정록 작가의 예술 세계를 탄탄하게 구축하는 역할을 하였다. 신성한 빛을 머금은 <생명나무> 연작은 국내외에서 많은 주목을 받았고 그의 대표작으로 인식되고 있다.
이정록 작가는 생명나무에 그치지 않고 성스러운 장소, 즉 ‘성소’를 찾아다니며 빛을 이용한 작업을 해나갔다. 여기서 ‘성소’란 장소의 의미와 작업의 형식에 따라 사적인 성소와 공적인 성소로 나뉜다. 2008년부터 시작된 <사적 성소> 연작은 작가의 개인적인 느낌에 따라 선택된 장소에서 이루어진 작품들이다. 예를 들어 어떤 장소가 거룩한 느낌이 든다면 그 주변을 정갈하게 만든다. 그런 다음 신령스러운 기운을 풍기는 돌이나 나무 등으로 의식을 행하듯 성소의 분위기를 조성한다. 이제 그곳은 작가만의 특별한 성소가 된다. 그리고 명상에 잠겨 공간의 에너지와 공명하며 촬영을 진행한다. 이런 방식으로 신성한 장소를 발굴하고 구축해가는 <사적 성소> 작업은 주로 국내에서 이루어졌다. 그에 비하여 공적인 성소를 배경으로 이루어진 작업은 대체로 국외에서 진행되었다. 공적인 성소는 터키의 카파도키아, 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 스페인의 산티아고 순례길처럼 역사적, 종교적, 문화적으로 의미 있는 숲, 고대 유적, 길, 바다 등을 가리킨다. 그런 곳에 깊이 서려 있는 거룩한 에너지를 나비라는 상징적인 형태의 빛으로 드러낸다. 이것이 2016년부터 시작된 <나비(Nabi)> 연작의 특징이다. 나비는 동서양 문화에서 영혼을 상징하고 히브리어로 선지자를 의미하기도 한다는 점에서 상당히 흥미롭다.
사적인 성소와 공적인 성소를 거치며 작업을 이어온 이정록 작가는 지난해 자신의 예술 세계를 어떻게 심화시킬 것인지 고민했다. 그때까지 해온 성소와 관련된 작업들은 모두 영성의 시선으로 설정한 장소를 배경으로 하였고 표현의 바탕에는 신화적 상상력이 깔려 있었다. 하지만 특정한 장소의 의미나 신화적 상상력도 결국 인간의 역사와 문화적 한계 내에서 작동하는 것이었다. 그는 그런 한계를 넘어 더욱 근원적인 것에 다가가고 싶었다. 그것은 사적인 성소나 공적인 성소로 분별되기 이전의 보다 원시적인 자연의 에너지와 신성에 대한 갈망이었다. 그래서 그가 지난해 여름 찾아간 곳이 아이슬란드였다. 여전히 문명의 때가 많이 묻지 않아서 야생 상태의 자연이 있는 곳을 택한 것이다. 외계 행성처럼 보이는 낯선 자연의 모습 앞에서 그는 원시 사회나 종교를 체험하기 전의 자연인으로 되돌아간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도처에서 약동하는 자연의 에너지를 느끼며 ‘Anima(영혼, 정신을 뜻하는 라틴어)’를 떠올렸고, 모든 자연의 사물과 현상에 영혼, 의식, 감정 등이 있다고 믿는 애니미즘적 세계관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되었다. 나아가 대자연의 힘에 압도되고 동화된 나머지 자의식이 희미해지는 상태에 빠지곤 했다. 그래서 그는 자연의 에너지가 이끄는 대로 작업에 임했다. 촬영은 주로 아이슬란드의 외곽 순환 도로 근처에서 이루어졌고, 때에 따라 강 16개를 건너서 깊이 들어가야 하는 험지에서 진행되기도 했다.
아이슬란드에서 진행한 작업들을 보면 기존 작업들과 유사한 점도 있고, 차이가 나는 점도 있다. 유사점은 <나비> 연작에서 사용된 나비 형태의 빛과 2011년부터 시작된 <디코딩 스케이프(Decoding scape)> 연작에서 등장했던 기호 형태의 빛이 아이슬란드 작업에서도 이어진다는 것이다. 이런 특정한 형태의 빛들을 사용한 이유는 작가가 체감했으나 보이지 않는 에너지를 단순한 빛이 아니라 풍부한 상징성을 지닌 빛으로 표현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나비는 앞서 설명한 것처럼 영혼과 선지자라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그리고 ‘ㅅ’ 과 ‘ㅇ’이 합쳐져 마치 사람 같은 모양을 하고 있는 기호는 다석 유영모의 한글 형태 해석에 영향을 받아 이정록 작가가 새롭게 조합한 상형문자 같은 것이다. ‘ㅅ’ 은 생명, 인간을 의미하고 ‘ㅇ’은 시간과 공간의 근본인 공(空), 우주, 하늘을 의미한다. 즉 하늘을 동경하는 인간의 모습이다. 이렇게 특정한 형태의 빛들을 이용한다는 점은 전작들과 유사하다. 하지만 몇몇 작품들은 주목할 만한 차이점이 엿보인다. 예를 들어, 짙푸른 호수와 하늘을 배경으로 분화구 위에 커다란 둥근 달처럼 나비 무리의 빛이 떠있는 작품이 있다. 이 사진에서 호수, 분화구, 원형의 빛은 모두 평면적이거나 단순하게 보이는데 전체적으로는 추상적이면서 강렬한 초월성이 느껴진다. 그 모습은 물과 불의 에너지가 공존하는 아이슬란드를 초월적인 공간으로 상징화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이 작품은 아이슬란드 연작을 대표할 만하다고 본다. 또 다른 작품으로는 사람 형태의 빛나는 기호들이 삼각형으로 솟은 바위 주변을 둥글게 돌고 있는 것을 들 수 있다. 이 작품은 기호를 이용한 전작들보다 더 자연스럽게 보이는데, 아마 신령한 바위를 숭배하듯이 돌고 있는 것들이 그저 나열된 기호들이 아니라 추상화한 생명체라는 것을 이론적인 설명을 듣지 않아도 즉시 느낄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다시 말해 장소성과 기호의 의미가 서로 적절히 스며들어 잘 어우러진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또 다른 면에서 주목할 만한 작품이 있다. 푸른 호수 한가운데 식물들이 자라는 작은 섬 주변을 나비 형태의 빛으로 드로잉한 사진들이다. 이 연작에는 분홍 빛과 노란 빛들이 녹색 식물들 사이에서 화사한 꽃처럼 피어나거나 수직으로 자라듯이 자리잡고 있다. 그리고 식물들과 호수 위에 아치 형태로 빛의 띠를 형성하고 있기도 하다. 이 빛들은 마치 식물들이 발산하는 신령스러운 기운인 오라(aura)를 연상시킨다. 그만큼 식물의 섬과 빛 드로잉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또한 이 연작에서 매우 흥미로운 점은 배경이 백야(白夜)라는 것이다. 지평선 너머의 태양빛으로 인해 밤이면서도 낮처럼 밝아 보이는 백야는 아이슬란드가 북극과 가까운 곳에 있기 때문에 여름철이면 볼 수 있는 자연 현상이다. 이 백야는 이정록 작가가 추구해온 독특한 시공간의 경험이 더욱 확장될 만한 환경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는 이제까지 주로 낮과 밤, 빛과 어둠의 경계가 뒤엉키는 시간에 드러나는 공간의 에너지를 포착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그런데 아이슬란드에서는 백야 덕분에 그 경계의 시공간을 더 오랫동안 만날 수 있었다. 모든 것이 드러나는 낮과 어둠 속에 빠져드는 밤이 뒤섞인 경계의 시공간은 어쩌면 차안에서 피안으로 인도하는 헤르메스(Hermes)가 지배하는 시공간일지도 모르겠다. 더구나 그의 작업 과정에서 생성된 빛들은 눈에 보이는 상징적인 형태를 띠면서도 보이지 않는 세계로 우리를 인도한다는 점에서 신의 뜻을 인간에게 전달하는 헤르메스와 같은 매개자적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그렇게 보면 백야라는 헤르메스적 시공간에 헤르메스적인 빛으로 드로잉된 이 연작들은 경계성의 의미를 더욱 강하게 내포하고 있는 셈이다.
예술가의 상상력과 표현 방식은 그의 세계관 안에서 자라나기 마련이다. 이정록 작가는 영성이 충만한 세계를 관조하며 신화적 상상력과 상징적인 표현으로 작업을 이어왔다. 그리고 그 작업의 중심에 빛이라는 언어가 있다. 빛으로 순간을 포착하는 카메라와 사진 매체를 사용할뿐 아니라 작업 과정에서 의도적으로 조명 기구를 이용해 독특한 빛 드로잉을 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빛은 물리적으로 파동이면서 입자라는 양면성을 가지기 때문에 가시적인 물질과 비가시적인 에너지의 양상을 동시에 드러내기에 유의미한 매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보여주려는 이정록 작가에게 빛 드로잉은 필연적인 어법처럼 보인다. 나아가 그에게 빛은 물리적인 차원을 넘어 사물의 내면과 깊은 무의식의 세계를 밝히고, 영성의 바다로 이끄는 매개체라는 의미가 있다. 이번 아이슬란드 연작은 사적 또는 공적인 성소와 차원이 다른 거대하고 격렬한 야생의 에너지 장에 접속하여 그 일부만 이정록 작가의 헤르메스적인 빛으로 드러낸 작업이라고 본다. 그래서 앞으로 아이슬란드에서 그가 어떤 방식으로 새로운 모험을 감행할지 기대된다. 그는 ‘아이슬란드 작업은 이제 시작이고 거대한 문 앞에 서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과연 아이슬란드에서 또 다른 창조의 문을 열 수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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