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백영 사진전 [어두움과 밝음, 그 사이] 展
2018년 10월24일 ~ 10월30일
갤러리 나우
어두움과 밝음, 그 사이
-성백영의 첫 개인전에 부쳐
심재상(시인, 가톨릭관동대교 교수)
I.
첫 개인전을 위해 일차적으로 선정한 작품들이라면서 그가 처음 내게 보여준 것은 사찰(寺刹)에서 우리가 쉽게 접할 수 있는 다양한 대상-사물들을 찍은, 한결같이 잘 정제된, 만만치 않은 내공이 느껴지는 20여장의 흑색사진들이었다. 날 놀라게 한 것은, 거의 예외적이라고 할 만큼 은은한 기운에 휩싸여 있는 어떤 정경들을 담고 있는 몇 장의 사진을 제외한 대부분의 사진들이 공통적으로 뿜어내는 강력한 양적(陽的) 기운, 그 기세였다. 유보 없는 단호함으로 대상-사물을 전경화(前景化)시키고 있는 그 사진들은 본격적으로 사진에 입문한 이후로 그가 어떤 길을 따라 왔는지를 아주 선연하게 보여주는 것들이기도 했다. 분명 그는 사진의 세계로 들어가는 길을, 혼신의 힘으로, 엄청난 집중력으로, 가능한 한 최단거리로---다시 말해서, 거의 일직선으로---달려왔을 것이다. 요컨대 그 사진들은 고도의 스킬을 구사할 수 있는 프로급의 카메라맨이 찍은 인증샷같은 것들이었다. 그런데, 대체 무엇을 인증받는단 말인가?
카메라의 가장 큰 미덕 혹은 가장 큰 악덕은 그것이 너무나도 광학적이라는 점이고, 사진의 최대의 장점, 혹은 최대의 약점은 그것이 너무나도 즉물적이라는 점이다. 카메라와 사진은 그 프레임 안에 존재하는 대상의 물질적 속성에 한사코 우리의 시선을 집중시키고 고정시킨다. 바로 그래서, 일찍이 19세기 상징주의 시대의 화가들을 끝끝내 괴롭혔던 문제는 모든 사진예술가들이 피할 수 없는 본질적인 문제가 된다 : 어떻게 특정한 대상을 통해, 그리고 바로 그 대상의 물질적 현존성이라는 커다란 장애물을 돌파하여, ‘그 너머’로 우리의 시선을 이끌어갈 수 있을까? 풍요로운 걸작들을 쏟아낸 상징주의 음악과 상징주의 문학과는 매우 대조적으로, 상징주의 시대의 미술은 그닥 큰 성과를 내지 못했다. 야심적인 목표를 제시하며 기세좋게 운동을 이끈 상징주의 미술화가들의 원대한 포부나 주장과는 달리, 그들의 작품들은 실제로는 대부분 진정한 상징력이 결여된, 편협하고 경직된 알레고리 차원에 머물러 있는 사물/대상들을 담아내고 있을 뿐이다.
양의 기운이 차고 넘치는 그의 많은 작품들도 이와 흡사한 느낌을 내게 안겨주었다. 다시 말해서, 그 사진들은 무엇보다도 먼저 일종의 알레고리로 거기 존재하는 대상-사물들을 담아내고 있었다. 이 다양한 대상-사물들은 모두가 비가시적인 어떤 존재(‘달’)를 가리키는 ‘손가락’들이다, 라고 그 사진들은 내게 말하고 있었다. 감히 고백하자면, 그 사진들은 즉각 내게 ‘심우(尋牛)’를 도식화한 ‘십우도(十牛圖)’를 상기시켰다....
II.
그런데 얼마 후, 그가 새롭게 취사선택하고 보완해서 내게 보여준 20편 남짓의 작품들 속에는 이 계열의 사진들이 대폭 줄고, 처음엔 소수로 남아있었던 은은한 계열의 사진들이 대거 늘어나 있었다. 실로 의미심장한 변화가 아닐 수 없다.
“마음을 비워야 좋은 사진을 얻을 수 있다.” 사진의 스승들이 가장 즐겨 하는 말이다. 사진은 시각이미지와 관련되어 있으니, 결국 그 말은 “마음을 비워야 잘 볼 수 있게 된다”는 뜻이다. 대체 무엇을 잘 볼 수 있게 되는 것일까?
최종적으로 이번 전시회의 중심을 차지하게 된 그 사진들이 공통적으로 담아내고 있는 것은 무엇보다도 ‘시간’이라고 할 수 있다. 더 정확하게는 시간의 ‘공능(功能)’, 그 생생력(生生力)에서 비롯되는 온갖 생성소멸의 다양한 기미들일 것이다. 그래서 그 사진들은 우리로 하여금 가만히 오래 들여다보게 만든다. 필경 그것들이 오래, 가만히 바라보아야 비로소 오롯이 눈에 들어오는 어떤 것들을 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어른대는 그림자처럼, 이따금 풍경(風磬)을 흔드는 바람처럼, 흩뿌리다 문득 그치는 눈발처럼, 비정형적이고 비확정적인 양태로, 덧없음의 덧없음이라는 형식으로 거기 존재하고 있는,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어떤 것들. 고요해지고 그윽해진 시선의 형식으로 바라보는 자만이, 때때로, 어떤 순간에, 아주 짧은 예외적인 순간에만 인식하고 경험할 수 있는 형언할 수 없는 어떤 것들. 일찍이 완벽한 기술복제가 가능해진 시대의 예술작품, 특히 사진예술을 정의하기 위해 발터 벤야민이 제시했던 ‘아우라’라는, 다분히 신비주의적인 용어로밖에 표현할 수 없는 어떤 것. 혹은 우리 옛사람들이 ‘현(玄)’이나 ‘묘(妙)’, 혹은 ‘홀황(惚恍)’이라는 단어로 즐겨 가리키곤 했던 어떤 것.....
물론 예술은 재능의 왕국이다. 그러나 그 왕국에 들어선 자는 누구나 그 무엇보다도 자신의 재능의 뿌리인 자신의 기질과 싸워야 하고, 스스로를 정신분석해야 한다(그것이 모든 예술의 역설이다). 본디 그는 일직선으로 찔러들어가는 무사, 진검승부로 한 칼에 베어내야 직성이 풀리는 가파른 성정(性情)의 소유자다(실제로 그는 한때 검도에 인생을 몽땅 걸었던 검도 유단자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는 그런 자신의 기질과의 싸움을 이미 시작하였다. 그가 최종적으로 골라낸 사진들이 내게 확인시켜 준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 자신도, 이미 언젠가부터 자신이 무의식적으로 실천해온 것의 의미를, 자신이 찍어온 사진들을 깊이 들여다보는 과정을 통해 점점 더 분명하게 자각하게 된 것 같다. 왜 예술은 직선이 아니라 곡선을 요구하는지를, 왜 자신이 찍은 사진들에서 캄캄한 어둠을 단숨에 이겨내고 압도하는 환한 빛이 아니라, 느리디 느리게 어둠으로부터 조금씩 스며나오는 어슴푸레한 빛이, 그렇게 조금씩 맑아지는 어둠이 그토록 큰 자리를 차지하는지를, 왜 대상-사물 그 자체들이 아니라, 그것들이 텅 빈 허공과 만나고 헤어지며 한데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어떤 관계들, 이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어떤 만남들, 그 모든 것들을 휩싸고 도는 한없이 나직하고 고요한 침묵들을 더없이 존중해줘야 하는지를.
“길이 끝나는 곳에서 진정한 여행은 비로소 시작된다.” 그의 진정한 ‘수행’도 이제 시작되었다.
어두움과 밝음, 그 사이
성백영
이 세상의 모든 존재들은 다들 그 자체로 아름답고 본디 스스로 환하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들 대부분은 그 아름다움 그 환함을 언제 어디서나 온전히 지각하고 인식하는 건 아닌 것 같다. 오히려 우리는, 삶의 대부분의 시간 동안, 세속적 삶의 틀 안에 스스로를 가둔 채 눈앞의 현실적 문제들과 싸우느라,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거품같은 욕망을 쫒느라, 덧없기 짝이 없는 감각적 쾌락에 몰두하느라, 몸도 마음도 쉼없이 바쁘고, 그러느라 마음이 흐릿해지고 점점 더 어두워진다. ‘무명(無明)’은 그렇게 어두워지다 못해 아예 캄캄해져서 눈앞에 오롯이 있는 것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딱한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다.
‘눈이 밝다’는 것은 그런 무명 상태를 벗어나 모든 것을 오롯하게, 바라보고 인식할 수 있는 고차원의 존재 상태를 의미한다. 어떻게 그런 시선의 힘을 갖출 수 있게 될까? ‘비워낸 마음’, ‘공(空)한 마음’에 도달하면 된다고 한다. 우리를 맹목적으로 내달리게 만드는 집착(執着)을 걷어내면 마음의 평온을 얻게 되고, 그러면 모든 것의 본질을, 그 아름다움을 꿰뚫어 볼 수 있게 된다.
그러나, 과연 나는 그 공(空)한 마음의 상태에 도달하여, 내 몸 또는 마음이 느끼는 그 어떤 것을 온전히 담아낼 수 있을까?
나는 평소에 산사(山寺)를 즐겨 찾는다. 각박한 현실에 시달리고 일상에 쫒기느라 알게 모르게 내 안에 들어찬 탐(貪)·진(瞋)·치(癡)의 탁한 기운들을 잠시나마 털어내고 싶은 생각 때문이기도 하고, 마음을 비워내기 위해 용맹정진하는 수행자들과 그들의 수행처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렬하면서도 신선한 기운을 온몸으로 느끼고 싶은 욕구 때문이기도 하다.
이번에 전시하는 작품들은 내가 불교 수행처에서 흔히 접하게 되는 피상적인 모습이나 전형적인 수행 도구들의 다양한 표정들 그 자체를 담아내려 한 것은 아니다. 때때로, 결정적인 어떤 순간에, 그것들이 내게 맛보게 해준 어떤 다른 느낌들을 최대한 온전히 포착하여 담아내는 것, 그것이 나의 일차적 목표였다.
산사는 속세를 벗어난 수행자들이 진정한 자아(我)을 찾아가는, 한없이 고요하면서도 더없이 치열한 실천의 공간, 전형적인 비움의 장소라고도 할 수 있다. 비록 짧은 시간일지언정, 그 신성한 공간에 머무는 동안, 나는 내 안을 채우고 있던 일체의 의식에 대한 집착을 최대한 내려놓으려 애쓰며 내 몸과 마음에 느껴지는 것들을 담아 내려고 노력하였으며, 그런 과정을 통해 나 자신도 조금 더 비워내는 일을 실천하려 애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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