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안내 및 소개 글

성두경 탄생 100주년 기념사진전

yun jong 2015. 11. 28. 10:03
잃어버린 도시, 서울 1950-1960s - 성두경 탄생 100주년 기념사진전: 모더니티의 서울

2015년 11월24일 ~ 12월6일

갤러리 룩스 

 

 

 

 

 

 

성두경 (1915-1986)


1915 경기도 파주에서 태어난 성두경은 1935 조지야백화점( 롯데백화점 영플라자) 서적 메라부에 입사하면서 사진과 만났으며, 1944 전조선사진연맹 주최 사진공모전에 입선한 사진활동을 시작했다. 1951 국군 헌병사령부 기관지 사정보(司正報) 사진기자로 종군하여 파괴된 서울의 모습을 필름에 담았으며, 1953 1 사진통신사인 동방사진문화사 전무, 그해 9 <동방사진뉴스> 편집국장을 역임했다. 1955 반도호텔 안에 반도사진문화사라는 이름의 사진관을 개업하여 반도호텔이 철거된 1976년까지 운영했다. 전업사진가로 활동하면서 대한사진예술가협회를 중심으로 창작활동도 이어왔다. 그는 주로 단체전 중심으로 사진작품을 발표했으며, 유작전으로 《다시 돌아와본 서울- 1951 겨울: 성두경 사진전》(서남미술관, 서울,1994) 있다.



 

 

성두경의 삶과 예술 그리고 기록

이경민 (사진아카이브연구소 대표)

1915년 경기도 파주에서 태어난 하림(河林) 성두경은 1935년 선린상업학교(현 선린인터넷고등학교) 전수과를 졸업하고 조지야백화점(현 롯데백화점 영플라자)의 서적•카메라부에 입사하면서 자연스럽게 사진과 접하게 되었다. 1944년 전조선사진연맹에서 주최한 사진공모전에 출품하여 입상하는 등 아마추어사진가로서의 활동도 이어나갔다. 사진연맹체인 전조선사진연맹은 1934년 창립된 조선총독부의 관변단체로 경성일보사와 함께 당시 가장 권위 있는 사진공모전이었던 《조선사진전람회》를 1943년까지 10회에 걸쳐 주최했으며, 다양한 주제의 공모전도 수시로 개최했다.

성두경은 1945년 해방 이후 동화백화점(현 신세계백화점)으로 자리를 옮겨 사진재료부를 직영했으며, 1948년에는 서울시 공보실에 촉탁사진가로 근무하며 시정사진과 공보사진을 담당했다. 그는 사진 관련 일을 하면서 틈틈이 사진공모전에 출품하기도 했는데, 1949년 조선사진예술연구회(후에 대한사진예술가협회로 개칭)에서 주최한 《제3회 조선예술사진전람회》에 【암석의 표정】을 출품하여 입선했으며, 1949년과 1950년 서울인상사진연구회에서 주최한 《어린이사진공모전》에서도 좋은 성적을 올렸다. 1946년 창립한 조선사진예술연구회는 해방 이전 조선인으로만 결성된 경성아마추어사진구락부(1937년 결성)와 백양사우회(1939년 결성)의 후신으로, 한국 사단의 정통성을 잇는 대표적인 사진단체였다. 1947년부터 1949년까지 세 차례에 걸쳐 주최한 《조선예술사진전람회》는 전국 규모의 사진공모전으로 신진사진가의 등용문 역할을 했으며, 성두경도 이때부터 본격적인 창작활동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성두경은 1951년 가족과 함께 막내 동생이 영관급 장교로 근무하던 대구로 피난을 떠났으며, 그곳에서 헌병사령부 기관지 『사정보(司正報)』의 사진기자(촬영반원)로 활동하였다. 『사정보』는 “헌병대의 건전한 육성 발전에 기여함과 아울러 전 헌병 장병의 절차탁마(切磋琢磨)와 친목을 도모코자” 1950년 12월 4일 창간되었다. 처음에는 발행인, 편집인, 인쇄인, 편집 책임장교, 문관, 연락병, 출입기자 등으로 발족되었으나, 1951년 1월 업무를 확장하고 내용의 충실을 도모하고자 전속기자 2명, 촉탁기자 1명, 촬영반원 1명, 촉탁화가 1명, 사무원 2명 등을 충원하여 모두 10명으로 재조직되었다. 성두경은 이때 문관의 신분으로 촬영반원에 합류한 것으로 보이며, 곧바로 전선에 투입되어 재탈환한 서울의 폐허를 필름에 담았다.

『사정보』의 사진기자로서 종군한 성두경은 임무를 마친 후 1953년 1월 기업가 김동근에 의해 설립된 동방사진문화사의 전무를 맡아 보도부를 지휘했으며, 그해 9월 동방사진문화사에서 창간한 『동방사진뉴스』의 주간을 역임했다. “보도사진의 촬영 제공뿐만 아니라 한국고유의 민족문화를 수록하여 대외에 소개하고 대내 계몽선전에 기여하고, 주한 유엔군 및 우방제국에 대하여 사진문화를 통한 국제친선 및 문화교류를 촉진시키고, 해외문화를 사진을 통해 도입하여 국내 문화 진전에 공헌하고자” 설립된 동방사진문화사는 일종의 사진통신사로서 언론이나 정부에서 필요한 사진을 제공하였다. 주로 낱장의 사진이나 사진엽서 형태로 제작하여 제공했는데, 뒷면에는 ‘동방사진문화사 보도부’ 명의의 스탬프를 찍어 저작권 표시를 남겼다. 동방사진문화사에서는 사진통신사 업무 외에 서울 재수복 2주년을 기념한 《한미친선사진촬영대회》와 《제1회 전국예술사진현상모집》 등의 사진문화 행사도 개최했으며, 특히 설립자 김동근은 1955년 8월 명동에 동방문화회관을 건립하여 문화예술인들의 사랑방으로 제공하기도 했다. 성두경의 필름 중에는 1953년경 귀국한 아나키스트 원심창 의사가 동방사진문화사를 방문하고 김동근 등과 함께 단체 촬영한 사진이 남아있어 그 역사적 가치를 더하고 있다.

1955년 성두경은 반도호텔로 자리를 옮겨 사진 스튜디오인 반도사진문화사를 개업, 1974년 반도호텔이 철거될 때까지 19년간 운영했다. 그는 여기서 스튜디오 사진뿐만 아니라 정부와 서울시의 의뢰를 받고 촉탁사진가로도 활동하였다. 1, 2부에서 전시되는 대다수의 사진들이 이 시기에 촬영된 것으로, 서울의 가로 경관과 주요 건축물 사진, 반도호텔을 중심으로 건물 내부와 바깥 풍경을 촬영한 사진, 무용가 김백봉을 비롯한 인물사진과 공연사진들로 구성되어있다. 이번 전시에 출품되지 않았지만 그의 사진자료에는 한국의 전통을 주제로 고궁과 한복 입은 여성, 전통 놀이 등을 촬영한 사진들이 다수 있는데, 1960년 창간된 관광사진뉴스사와 관련된 것들로 보인다. 이 곳에서는 “한국의 문화재인 명승고적 및 유람지를 사진으로 수록하여 국내외에 널리 소개 선전”하기 위해 『관광사진뉴스』를 발행했으며, 성두경이 고문으로 있었고 동방사진문화사 시절부터 함께 일했던 송건배가 편집장을 맡고 있었다. 물론 ‘관광’은 이승만 정권과 박정희 정권하에서 전후 복구과정과 근대화 과정에서 문화재와 함께 대표적인 전통문화콘텐츠로 개발되었다. 이런 맥락에서 공보실과 서울시 관광과 그리고 국제보도연맹에서 발행한 화보잡지에는 성두경이 촬영한 김백봉의 무용 사진이 반복적으로 수록되었다. 김백봉은 1950~60년대 한국 전통(미)의 대표적 표상이었으며, 여기에서 성두경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것이다.

1955년은 김조현, 박필호, 이해선, 임인식, 현일영 등과 함께 ‘거리회’라는 친목 단체를 결성한 해이기도 했다. 매년 송년의 밤 행사를 갖고 회원들의 자필 서명을 받아 서로 나누어 가질 정도로 회원들과의 친분이 깊었다. 1956년 4월 동화백화점 4층 화랑에서는 김제권, 남상준, 방대훈, 서순삼, 성두경, 이훈, 이해선, 지부원 등 모두 8명의 사진가들이 《8인 사진전》을 개최했으며, 1957년 2월에는 성두경, 이건중, 이경모, 정도선, 정희섭, 조명원, 최계복 등 모두 7명으로 구성된 한국사진작가단이 창립되었다. 세계적인 보도사진 전문 통신사인 매그넘(MAGNUM)을 모델로 만든 이 단체는 프로 의식을 갖고 본격적인 상업사진 시장에 뛰어든 직업사진단체로서, 2년 남짓 활동하면서 창립전을 포함, 모두 4차례의 회원전을 열었다. 성두경을 비롯해 회원들 중 일부는 문교부의 위탁으로 1957년 발간된 『국보도감』의 사진원고 제작에 참여하기도 했다.

한편 대한사진예술가협회(이하 대한사협) 회원들이 반도사진문화사에 자주 드나들면서 이 공간은 자연스럽게 대한사협의 사무실 역할을 했으며, 이를 계기로 성두경은 대한사협에 입회하여 총무이사(1958년)와 부회장(1960년)에 이어 1977년에는 회장에 피선되기도 했다. 이처럼 그는 주로 대한사협을 중심으로 창작활동을 이어갔으며, 사진 잡지와 연감에도 작품을 수록하여 지면으로 발표한 적도 있다. 1956년 창간된 『사진문화』 5월호와 1966년 창간된 『사진예술』 8월호에 각각 【P도의 풍물】과 【컴포지숀】이 수록되었으며, 1966년 조명원에 의해 한국 최초로 발행된 『한국사진연감』과 1970년 한국사진작가협회의 첫 번째 사진연감인 『한국사진연감』에 각각 【투계(鬪鷄)】와 【작업장】이 실렸다. 여러 공모전과 회원전에 출품한 사진작품 다수가 현재 실물로 존재하지 않지만, 1978년 당시 성두경 스스로 대표작으로 뽑은 1951년 작 【안개길】과 앞서 언급한 1956년 작 【P도의 풍물】 등 모두 4점의 빈티지 프린트를 1부에서 살펴볼 수 있다.

빈티지 프린트를 포함해서 이번에 필름에서 새로 발굴한 예술사진을 관통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사진 매체가 갖는 모더니티에 대한 자각이다. 그것은 도시 경관과 건축물을 촬영한 사진에서도 쉽게 발견된다. 이들 사진은 내용적으로는 한국전쟁에 의해 파괴된 서울의 모습과 전후 복구와 도심 재개발로 새롭게 탄생한 서울의 모더니티를 보여주지만, 그것이 풍경이든 건물이든 인물이든 어떤 대상이든지 간에 톤과 프레임, 그리고 앵글의 자율성을 통해 사진에서의 모더니즘적 가치를 보여주고자 노력했던 성두경의 시선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성두경은 사진재료상과 사진 스튜디오 운영, 사진통신사와 사진 보도매체 근무, 종군사진가와 촉탁사진가 활동 등 사진 일을 평생 직업으로 삼으면서 제일선에서 사진 매체의 사회적 쓰임을 확장하는 데 노력했었다. 비록 사진 일을 하면서 정부나 군(軍), 서울시와 언론매체들의 주문과 필요에 의한 이미지를 제작해왔지만, 그러한 주문과 요구들을 시각화하는 것은 온전히 사진가의 몫이다. 따라서 사진을 시대의 반영이라고 할 때 성두경의 사진 속에는 수많은 표상 주체들의 재현 의지와 사진가의 시선이 교차되어 있기 마련이다. 그동안 예술제도 바깥에서 생산되었다는 이유로 사진 담론에서 배제되어 왔던 그의 사진을 이제 새로운 해석의 공간으로 끌어낼 필요가 있다. 이 전시가 그러한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