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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현준 [품, The Affair] 展

yun jong 2019. 6. 8. 11:26
배현준 [품, The Affair] 展
2019년 06월 05일(수) - 06월 18일(화)
갤러리 나우

 

 

 








 

 
지구의 밤과 낮이 동시적이고 순환 반복하듯, 갯벌의 흔적들은 시점에 따라 음각으로 양각으로 이미지를 드러냈다. 이런 음각과 양각은 동일체의 다른 양상인 착시이며, 출몰을 반복하는 갯벌의 흔적들과 같이 순환 반복될 뿐이다. 이런 경험이 이번 작업에서 음과 양의 동시성과 순환 반복성, 음과 양이 어울려 만들어 내는 새로운 세계 - ‘사태 [The Affair]’를 통해 '세계의 시공간성'을 말하고 있다. 
갯벌의 [품]은 음양의 경계를 넘어서 음양을 [품]는다. 시작과 끝을 [품]는다. 삶과 죽음을 [품]는다. 경계를 넘어서 자유를 [품]는다. 

갯벌 위의 흔적들은 조류의 흐름에 따라 만들어지고 사라진다. 그 흔적들은 아름답지만 이내 사라지고 말아 허무하다. 아름다운 허무다. 그러나 흔적들은 다시 생성과 소멸을 반복한다. 동일자의 영원회귀다. 이렇게 순환하는 갯벌의 시간은 반복될 뿐 지향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 어찌 보면 인간이 만든 총량적 시간이란 관념일지도 모른다.

그 흔적 중에 새발자국의 이미지는 눈길을 끌었다. 육안으로 보면 음각이었으나 이미지는 양각이다. 새발자국이 날아가고 있었다. ‘새는 발자국도 난다.’라고 표현하니 흥미로웠다. 그런데 다시 위치를 바꿔 촬영하자 그것은 음각으로 나타났다. 빛의 방향에 따라 이미지가 변한 것이다. 그러나 새발자국은 그대로 변함없다.

우리의 세계인식은 빛의 반사를 시지각으로 인지한 내용이고, 빛의 위치에 따라 대상에 대한 내용이 달라지면 시지각에 의존한 세계인식은 불완전해 진다. 그리고 시지각이 인식한 내용을 추상화한 선형문자로 개념화하고, 또 문자로 표현하는 주체의 주관적 인식이 반영되면서 세계인식은 더욱 불완전해 진다.

사람들은 태양의 위치에 따라 밤은 밤으로, 낮은 낮으로 구별하여 선형적 문자로 개념화한다. 그런데 지구의 밤과 낮은 동시적이면서 낮이 밤이 되고 밤이 낮으로 순환된다. 밤과 낮이 하나가 된다. 이렇게 낮과 밤에 대한 인위적인 개념에서 벗어나면 밤과 낮은 동일자로 영원 회귀하는 순환론적 세계인식 논리를 갖게 된다.

이렇듯 세계 인식에서 ‘나의 시선 – 인위적인 개념’을 비우면 경계가 사라진다. 낮과 밤이 동시에 존재하듯, 빛과 어둠이 동시에 존재하는 세계, 빛도 어둠도 하나인 세계, 인위적인 구별이 없는 세계만 남는다.

갯벌의 흔적(세계)도 부감俯瞰의 앵글로, ‘이아관물以我觀物에서 이물관물以物觀物’로 관점을 바꾸자 객관화된 물자체가 본질을 드러낸다. 그리고 인위적으로 구분했던 세계는 경계를 넘어 이종융합하면서 새로운 세계로 표현된다. 이젠 음양도 새로운 관계를 맺으면서 충만한 의미를 만들어 내는 「사태」가 된다.

선형적 문자의 시대, 역사의 시간은 절대성을 지향한다. 그러나 말씀의 시대가 사진영상의 시대로 대체되면서 시간은 혼재되는 사태 – 영원회귀의 허무주의에 도달한다. 이제 남은 것은 절망이 아니라, 절대성에서 벗어난 개인의 자유다. 괴델 예셔 바흐의 세계처럼 경계를 횡단하면서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낸다.

우연에서 필연으로 필연에서 다시 우연으로, 재현에서 상징으로 관념에서 물자체로 환원하여 세계의 본질을 드러내는 나의 작업 방식은 지극히 디지털적이다. 합성, ‘바느질(봉합)’의 과정을 통해 재구성된 화면 속에서 나의 철학적 담론을 표현하고 싶었다. 촬영한 사진 중에서 내 의도에 맞는 사진을 선택하는 과정보다 촬영한 사진들을 재구성Making Photo하는 과정을 택했다. 피사체를 오려내어Framing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피사체를 분해하고 재구성해서 물자체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는 추상적 관념 – ‘갯벌(세계)의 시간성’을 표현하려 했다.

10 년 전, 우연히 갯벌을 만났다. 그 갯벌 - 『모성의 발견』(2011)이 날 위로했다. 그리고 갯벌의 『흔적』(2015)에서 ‘아름다운 허무주의’를 보았다. 그러다 갯벌에서 10 년이 지났다. 갯벌 한 복판, 자연이 된 체험 속에서 사진이 날 위로하는 날들이었다. 그런데, 이젠 ‘철학하는 사진’을 꿈꾼다. ‘미술의 역사는 철학의 문제로 점철되어 있다.’라고 말하듯 사진의 역사도 그렇다. 여행 속에서 여행을 꿈꾸듯 사진 속에서 사진을 꿈꾼다. 갯벌의 흔적이 나에게 빌려주니 어찌 말이 없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