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중호의 촬영지가 체코였던가? 시골의 구릉은 바다의 너울처럼 밀려가고 밀려오는 환상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 들판은 마치 물감을 풀어 놓은 색면(color field)이었다. 그가 찍은 들판은 비스듬한 사선을 이용하여 절제 된 화면을 보여 주는데, 풍경의 단순한 조형미는 전적으로 300mm 망원렌즈를 통해서 얻어진다. 모든 렌즈가 세상에 대한 다양한 호기심을 반영하도록 제작 되겠지만, 선택 된 렌즈는 찍는 자의 미의식을 드러내는 도구이다 이것은 일종의 프레임 의식이겠는데, 세상과 프레임 안을 무의미와 의미로 구분하고, 프레임 안의 세계만을 유의미하다고 보는 것이 작가 의식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작가는 한 부분만 드러내지만 전체와 연결시킬 수 있는 여지를 열어두는 것을 잊지 않는다. 그 연결은 아마도 보는 자의 상상력이지 않을까 싶다.
전중호의 화면의 특색은 긴 렌즈로 풍경에서 공기를 뺀 듯 압축함으로 단순화된 조형적 모험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구상적 추상으로 향하는 움직임 같다. 서로 무관하게 색으로만 분리 된 구릉의 공간들이 찍는 자의 직관 혹은 느낌 아래서 하나의 이웃이 되어 동거를 시작한다. 이 때, 구릉과 구릉이 단지 면대 면으로 만나지만 다른 색을 기반으로 서로 스며들어 조형적 질서 속에 하나로 통합 되는 것이다. 이는 전적으로 긴 망원렌즈로부터 기인하는 것이기도 하다. 즉, 기하학적 패턴을 축으로 삼아 그것을 자유롭게 변형함으로써 그가 본 풍경을 장악하고 있다. 풍경의 진정한 소유는 집중하여 대상을 살피는 데 있다. 그 요소들을 살펴보고, 그 구조들을 이해하고자 하는 의식적 노력이 없다면, 풍경은 내게 새롭게 감응하지 않는다.
전중호의 풍경은 풍요로운 색과 선, 점들이 음악의 느린 라르고처럼 교차하면서 빚어낸 구성적 패턴의 베리에이션이다. 단지 이런 요소들이 색과 선이라는 조형적 요소에 갇혀 있지 않고, 찍은 자가 염원하는 세계로 항해하는 과정에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하나의 꿈꾸는 세계로 가는 예술적 궤적인 것이다. 나는 그것을 물어 보았고 전중호는 ‘평화’라고 답을 내놓았다. 그가 믿는 창조주가 내보이는 아름다움에 그의 몸을 의탁했고, 그것을 보았고, 그것들에 말을 걸고, 그것으로부터 응답을 받았다. 그의 찬양에 대한 답이 ‘평화’가 아닌가 싶다.
신은 천지를 창조한 후 스스로 짧은 평가를 내렸다. 성경은 바짝 졸인 문장으로 짧게 적어 두었다. ‘보시기에 좋았더라.’ 가 그것이다. 그러나 전중호가 ‘보시기에 좋았던 저 들판’을 거울처럼 찍었다면, 아마도 그것은 한 사진가의 세계이기보다 창조주의 세계에 대한 거울 기능에 머물렀을 것이다. 신의 창조물로서 자연과 사진가의 감수성이 드러난 사진예술은 다르다. 아니 달라야 한다. 전중호의 화면은 이 두 가지 요소를 적절하게 아우르고 있어서 ‘보기에 좋았다.’ 눈에 보이는 대상을 그대로 찍어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형(形)이나 색(色)으로 환원 시키는 것이기에, 하나의 느낌으로 다가 오는 것이다. -최건수(사진평론가) 평론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