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안내 및 소개 글

박상우 PARK Sangwoo

yun jong 2017. 2. 6. 09:13


전시기간 : 2017. 2. 9 - 3. 5

박상우 PARK Sangwoo
갤러리 룩스



세속의 세계로 내려온 모노크롬 사진_박평종 (미학, 사진비평)


사진이론가 박상우의 모노크롬 사진전은 몇 가지 측면에서 주목을 끈다. 우선 현대미술과 사진이론 분야에서 풍부한 텍스트를 생산해 온 연구자의 개인전이라는 점, 최근 한국미술의 한 복판에서 다시 논의되고 있는 이른바 ‘단색화’와 맞물려 있다는 점, 모노크롬을 사진으로 ‘재해석’하고 있다는 점에서다. 연구자의 개인전을 ‘특별한’ 사안으로 거론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창작의 자유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을 뿐만 아니라 ‘연구자’ 박상우는 사실 오랫동안 집필과 창작활동을 병행해 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의 작업이 이론 연구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사실을 언급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오히려 이 전시에서 주목할 키워드는 ‘모노크롬’과 ‘사진’이다. 왜 모노크롬인가? 나아가 왜 사진인가? 이 질문에서 시작하기로 하자.


21세기의 초입에 모노크롬을 ‘예술작품’으로 제시하는 행위는 낯설다 못해 엉뚱해 보일 정도다. 왜냐하면 이미 모노크롬은 20세기 아방가르드예술의 무수한 ‘실험’을 거쳐 미술사의 ‘자료’로, 즉 과거의 유물로 전락한 측면이 짙기 때문이다. 말레비치의 절대주의에서부터 추상의 극단을 향한 운동으로서의 모노크롬이 있다. 라인하트(Ad Reinhardt)의 ‘블랙 페인팅’이 있고, 라이만(Robert Ryman)이나 라우셴버그(Robert Rauschenberg)의 ‘화이트 페인팅’도 있다. 이브 클렝(Yves Kein)에게 ‘IBK’라는 청색 모노크롬이 있다면, 만조니(Pierro Manzoni)에게는 ‘Achrome’이라는 비색화(非色畵)가 있다. 사실 20세기는 모노크롬 회화의 전성기였으며, 심지어 그 경향은 19세기부터 있었다. 그토록 다양한 유형과 무수한 범주의 모노크롬이 과거에 존재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시점에서 다시 모노크롬을 창작의 화두로 삼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작가’ 박상우의 전언은 명확하다. 모노크롬의 시대는 끝나지 않았고 오히려 지금부터라는 것이다. 그 새로운 시작은 모노크롬 사진에서부터다. 그 논리를 간략히 더듬어보자.


모노크롬을 추구했던 화가들의 생각과 미술사의 논리에는 편차와 다양성이 있다. 단색을 절대성의 표현으로 받아들인 경우, 추상의 궁극적 도달점으로 밀고나간 경우, 시각의 전제 조건으로 탐구한 경우, 기존 회화에 대한 극단적 부정의 형태로 제시한 경우 등 그 목적과 지향은 제각각이다. 그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시원은 고전적인 재현 회화와의 결별에서 찾을 수 있다. 실재를 재현하고자 하는 충동이 꺾인 지점에서 회화는 다른 길을 모색해야 했다. 그 과정에서, 혹은 그 결과로서 출현했던 아방가르드 미술의 다양한 양상들 속에 모노크롬 회화가 있다. 핵심은 화폭에서 오브제(사물)를 추방하는 것이다. 그러나 오브제 없이 도대체 어떻게 화폭을 채울 것인가? 이 딜레마를 극복하기 위해 화가들은 번민에 번민을 거듭했다. 말레비치는 구체적인 사물의 재현을 단념하고 절대성(신, 신성)을 재현 대상으로 상정하면서 궁극의 회화, 말하자면 ‘최후의’ 회화를 꿈꾼다. 그 과정에서 생산된 기하학적 형태와 추상은 현대판 성상파괴주의(Iconoclasm)로 해석되기도 한다. 한편 추상표현주의자들은 사물(공간) 대신 ‘평면’을 선택하지만 결국 미니멀리즘의 오브제 전략에 밀려 ‘실패한’ 모노크롬으로 남는다. 모노크롬의 ‘과격한’ 신봉자들은 컬러를 버리고 무채색에 탐닉하나 결과는 마찬가지다. 단일한 블랙 속에도 형태와 명암이 있는 것이다. 심지어 빈 캔버스를 연상시키는 화이트 모노크롬으로도 형태의 흔적은 지울 수 없었다. 오히려 화가들은 적극적으로 ‘은밀하게’ 형태를 심어놓는다. 미니멀리즘을 통해 얻은 교훈이다.


모노크롬 화가들의 고민을 과장하여 예시해 보자. 아무 것도 그리지 않은 그림, 그저 물감만 발라놓은 그림이 회화인가? 나아가 물감마저도 펼쳐놓지 않은 텅 빈 캔버스도 회화일 수 있는가? 수많은 종류의 모노크롬 회화가 전자의 질문에 이미 답을 말해주고 있다. 또한 뒤샹의 파격은 BHV에서 구입해 온 텅 빈 캔버스도 ‘비록’ 회화는 아닐지언정 ‘예술작품’일 수 있다고 강변한다. 이런 종류의 Q&A는 이제 유치하고 무의미한 지경에 이르렀지만 그 덕분에 모노크롬의 논리는 더욱 탄탄해졌다. 즉 오브제가 없더라도 단색으로 풍부한 감각 대상을 제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실상은 단일해 보이는 색 속에도 무수한 색의 스펙트럼이 있으며, 오히려 이 ‘미세한’ 차이가 모노크롬의 풍요를 만들어낸다.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 블루가 있는가? 따라서 모노크롬이 멀티크롬보다 단조롭다고 할 수 없다. 물론 냉정하게 말하자면 모노는 멀티보다 무미건조하다. 그러나 이 ‘무미’가 지닌 심미적 차원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오히려 무미의 차원은 취미판단의 주관성이라는 칸트 미학의 딜레마를 극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단서를 품고 있다. 좋은 취향(bon goût, good taste)과 나쁜 취향(mauvais goût, bad taste)의 ‘주관적’ 구분이 어떻게 ‘객관성’을 획득할 것인가. 무미(sans goût, without taste)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가능성’의 영역으로 남겨둔다. 중국 회화에서도 무미는 최고의 경지로 간주됐다. 어떻게 눈을 현혹시키지 않고 아름다움을 표현할 것인지, 감정의 동요 없이 세속 취향에 흔들리지 않고 어떻게 감동을 담아낼 것인지에 대한 성찰은 무미의 차원이 추구하는 가치와 맞닿아 있다. 단조로워 보이는 모노크롬은 그렇게 무미의 미학을 향한다.


이제 모노크롬 사진으로 돌아가 보자. 작가는 왜 굳이 사진으로 모노크롬의 세계를 펼쳐보이고자 했을까? 단적으로 말하자면 적합한 매체여서다. 말하자면 오브제 자체에 모노크롬의 세계가 있으며, 오브제를 ‘필연적으로’ 대면해야 하는 사진의 특수성은 그 세계를 ‘발견’하는 데 가장 효과적이다. 회화는 오브제를 버림으로써 모노크롬을 실현할 수 있었다. 하지만 사진을 취한 작가는 반대로 오브제에 적극적으로, 그리고 무엇보다도 ‘가까이’ 다가감으로써 모노크롬의 놀라운 우주를 발견했다. 게다가 그 ‘우주’는 심오한 ‘절대성’이나 복잡하고 난해한 논리의 세계 속에 있지 않다. 오히려 모노크롬의 우주는 일상 속에 널려있다. 사람들의 손 떼 묻은 휴대폰 액정화면이나 지폐의 표면, 비행기 창밖으로 펼쳐진 하늘이 모두 모노크롬의 광대한 우주에 속한다. 따라서 작가의 암시에 따르면 모노크롬은 오브제 자체다. 오브제의 표면은 모노크롬으로 덮여있다. 그런 점에서 오브제를 축출함으로써 모노크롬의 세계를 열고자 했던 화가들의 노력은 부질없다. 사용자들의 지문과 터치자국을 근접 촬영한 휴대폰 액정화면은 다양한 ‘블랙 페인팅’이 보여주는 붓 터치의 흔적과 다를 바 없다. 검정색 모노크롬 사진의 표면은 풍부한 형상으로 가득 차 있다.


휴대폰이나 동전, 지폐 등 일상의 오브제로부터 모노크롬을 찾아 나선 작가의 또 다른 의도가 있다. 모노크롬은 신성을 상징하는 종교의 세계나 논리로 무장한 철학의 세계, 단아한 형상으로 표현된 ‘고상한’ 예술 세계에만 한정될 수 없다. 오히려 그것은 통속적인 세계, 미추가 뒤섞이고 선악이 넘나들며 고상한 가치가 평범한 가치에 자리를 물려주는 세속의 세계에 속한다. 휴대폰 액정 화면을 덮고 있는 ‘미세한’ 형상들은 사실 더럽고 지저분한 손 떼 자국의 산물이며,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면 온갖 세균으로 뒤덮여있을 것이다. 그러나 ‘적당히’ 다가가면 우아한 모노크롬의 세계가 보인다. 거기서 은하수를 보는 이도 있고, 블랙홀을 보는 이도 있으며 낭만적인 밤하늘을 보는 이도 있을 것이다. 무섭고 침울한 절망의 상징으로 받아들이는 이도 당연히 있을 것이다. 그것이 모노크롬이 지닌 풍요로운 시각적 특성이다. 이제 작가의 ‘통속적인’ 모노크롬은 물질의 세계로 향한다. 금과 은, 동전, 지폐가 그것이다. 통속적이면서 동시에 숭배의 대상인 이 물질들은 휴대폰 화면과 달리 ‘멀리서’ 보아야만 모노크롬으로 탄생한다. ‘너무’ 가까이 다가서면 우아한 모노크롬의 표면은 사라지고 형태의 디테일이 나타난다. 물질을 멀리 하라는 뜻일까? 어쨌든 작가의 모노크롬 사진은 결국 모노크롬이 ‘저 너머’ 초월적 세계와 관계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저 아래’ 세계에 존재하는 ‘평범한’ 가치와 맞닿아 있음을 주장한다.


이런 맥락에서 작가의 모노크롬 사진은 기존의 모노크롬 회화에 대해 격한 비판과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다. 요컨대 작금의 모노크롬 회화는 초월과 숭고라는 이름으로 모노크롬의 세계를 한정시켜 버리지 않았느냐는 것이다. 작가는 이 작업을 통해 모노크롬을 세속의 세계로 ‘하강’시킴으로써 ‘축소된’ 모노크롬의 가능성을 회복하려 한다. 결국 통속적인 오브제를 끌어들여 ‘숭고한’ 회화를 질책하고 있는 셈이다. 그 질책의 목소리는 낮지만 묵직하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모노크롬은 ‘저 너머’의 세계를 향한 창문이 아니라 ‘바로 여기’를 비추는 거울이라고. 그리고 그 거울이 보여주는 세계는 작품이 보여주듯 역설적이게도 우아하고 아름답다.



박상우 PARK Sangwoo

現  중부대학교 사진영상학과 교수

학력
2008 프랑스 국립고등사회과학원(EHESS) 사진학 박사
2002 프랑스 국립고등사회과학원(EHESS) 사진학 석사
1991 서울대학교 사회과학대학 지리학과 학사

단체전
2016 폐기된 사진의 귀환: FSA 펀치 사진, 갤러리룩스, 서울
2012 대구사진비엔날레 특별전, 대구예술발전소, 대구
   한중수교 20주년 사진전, 중국연변대학교, 연변
   제 8회 이마고, 갤러리아백화점, 대전

전시기획
2016 폐기된 사진의 귀환: FSA 펀치 사진, 갤러리룩스, 서울
2010 서울사진축제, 서울시립미술관, 서울

출판
2016 『다큐멘터리의 두 얼굴: FSA 사진 아카이브』 (박상우, 이영준 공저, 갤러리 룩스, 경기문화재단 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