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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지환 개인전 [길 위에 서다]展

yun jong 2016. 2. 23. 13:41

배지환 개인전 [길 위에 서다]展
2016년 2월24일 ~ 3월1일

갤러리 나우

 

 

 

 

배지환의 <시간초상> 앞에서

사진은 대상을 포착하여 카메라 속으로 끌어오는 데 있다.
그러나 그에 앞서 대상에 이끌리는 지극히 현실적이고 실제적인 관계 속에 있다.
표현에 앞서 인상이, 포착에 앞서 사유가 먼저라는 말이다. 사진이 다른 시각예술과 다른 점도 이것이고, 같은 사진이라도 예술사진이 다른 사진 장르와 다른 점도 여기에 있다.
이처럼 사진의 본성은 피사체라고 불리는 대상과 사진가 사이에 존재하는 내밀한 사유 관계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기에 곁들여서, 또 한 가지는 시간이 만든 ‘시간초상’의 문제이다.
사진은 시간의 얼굴이고 흔적이다. 사진에 3가지 시간의 얼굴이 존재하는데 대상의 시간, 사진가의 시간 그리고 관객의 시간이다. 사진이 대상과 만나야 찍히니까 대상이 그 자리에 있어야 하고 사진가도 그 자리에 있어야 한다. 피사체와 사진가의 단 한 번 물리적 만남으로 사진이 태어난다.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여기에 변수로 자리하는 것이 관객의 시간이다. 결국 사진이 누군가가 봐주기 위해 존재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쉽게 이해가 된다. 따라서 언급한 제 요소들을 하나의 공통분모로 함축하면 사진의 정체는 시간초상이다. 그러니까 시간을 머금은 피사체, 그 자리에 있었던 사진가, 훗날 관객들이 바라보는 시간들의 얼굴이다.

배지환의 사진은 사진이 ‘시간초상’이라는 사실을 매우 명확하게 교과서처럼 드러낸다.
지리산 호스피스에 요양 중인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찾았던 길 위에서 만난 것들을 피사체들로서 바라본 순간 아버지의 시간이 되고, 작가의 시간이 되고 만다. 이때 관찰과 탐색은 ‘바라봄’을 넘어서 ‘알아봄’으로 이행한다. 사진의 철학적 성찰은 어느 한순간 예기치 않게 날아온 알아봄의 순간에 있다. 작가가 말한 “낡아서 곧 쓰러질 거 같은 건물에서 아버지가 왜 생각났을까?”라는 말은 바라봄에서 알아봄으로 전이되는 통각의 순간이다. 또 대상의 시간과 사진가의 시간이라는 두 육체적 존재의 맞부딪힘의 순간이다. 한순간의 통각으로부터 “길 위에 서다”가 출현한다.

배지환의 사진들은 이런 통각의 거리(distance)들이 선명하게 부각된다.
작가가 취한 대상들의 시간들을 보자. 인생부동산, 동양슈퍼, 신흥미용실, 백양떡방앗간, ‘금성면’택시, ‘무장’터미널 슈퍼 등등 가게들의 이름에서 그리고 그것들의 외형과 위치하는 공간구조에서 우리는 한물간 그러나 한 시대를 풍미한 시간초상들을 바라본다. 이 같은 시간초상들은 아버지의 시간초상들과 교집합 속에 있게 된다. 때문에 작가는 대상의 시간과 작가의 시간(아버지의 시간을 포함해서)이 접점을 이루는 그 찰나의 순간에 여러 가지 고민을 한다. 즉 카메라는 어디쯤에서 그리고 어떤 시간의 초상들을 채색해야 할 것인가?

이를 위해 작가는 대상들에 대해서 ‘일관된’ 시간의 거리를 유지한다. 이리저리 감정적인 카메라 워크를 구사하는 게 아니라 일관되게 그들의 시간을 지켜보게 한다. 시간초상의 기본 전제는 일관된 바라봄의 거리이다. 그 거리가 유지될 때 알아봄으로 연결된다. 때문에 작가는 일관되게 대상들의 전면(前面)과 정면(正面)을 투사한다. 전면이 살아온 시간의 총체라면 정면은 시간의 자부심과 같은 것이다. 세상 모든 얼굴들의 중심부가 되는 ‘파사드(facade)’ 미학이다.

또 하나는 대상들을 채색하는 ‘일관된’ 시간의 톤이다. 일관된 시간의 디스턴스처럼 일관되게 시간의 톤을 유지한다. 분명 대상들을 마주했을 때 저마다 밝기, 색깔, 광선의 음영들이 달랐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일관되게 하나의 색과 톤, 즉 빛이 바랜 색깔, 중간적인 중성 톤을 구사한다. 이 역시 시간초상에 다가가는 미학적 방법론이자 예술미감이다. 자칫 현란한 색깔, 현란한 색조들이 앗아갈 시간초상의 존재감을 위한 것이다. 그렇다면 피사체와의 일정한 거리감, 일관된 전면과 정면, 여기에 밝기, 색깔, 색조의 일관성을 유지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이 대답은 현대사진이 오랫동안 고민해온 카메라 워크의 중간적, 중성적, 중립적 혹은 객관적 거리 두기의 문제일 것이다. 엄격히 말하면 배지환의 사진은 배지환의 시간초상이 아니다.
대상들은 우리 모두가 바라보는 우리 모두의 시간초상이다. 작가가 아버지를 생각했지만 아버지는 아닌 것이다. 결국 중간, 중성, 중립의 위치에 놓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다음은 작가의 말이다.

“시선과 사진이 맞닿는 순간 평면의 사진은 마음을 요동치며 그리움이 담긴 피사체로 바뀐다.
그리고 이 피사체들은 미래의 누군가의 사진 앞에서 또 과거의 우리와 마주하게 할 것이다.”

그렇다. 배지환의 “길 위에 서다”는 아주 담백한 사진적 서사이다.
사진의 본성인, 내 안에 이는 어떤 일렁임을 사물(피사체)에 이입시켜 표출하는 사진의 모습이다. 작가는 이런 과정에서 사진가가 어떤 태도를 견지할 때 시간의 초상으로서, 시간의 흔적으로서, 나아가 예술과 미학의 모습으로 사진이 자리할 수 있는지를 아주 담백하게 보여준다.
어떤 경우도 사진은 기록성과 사실성이 사진의 힘이다. 늘 그것에 다가서려는 사진가의 철학과 태도가 문제일 뿐이다. 배지환의 사진은 현대사진의 방법론을 충실히 따르면서도 사진의 본질인 시간 표상으로서 시간초상, 즉 사라짐의 미학과 만나게 하는 멋진 매력을 발산하고 있다.


진동선
<사진평론가, 현대사진연구소 소장>

 

 

 

"길 위에 서다" (Halt on the road)

2011년 2월,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지리산에서의 요양 생활에서부터 호스피스 병동 생활까지..
1년여의 병간호 생활은 사진가의 본분을 잠시 잊게 했고, 장례를 치르고 나서도 계절이 두 번이나 바뀌는 동안 카메라를 손에 들 수 없었다.

그렇게 계절을 보내고, 어느 여름날 아버지가 보고 싶어 다시 찾아간 지리산은 참 반가웠다.
산은 아버지였다. 나무 한 그루, 돌멩이 하나에 아버지의 가뿐 숨소리가 담겨있었다. 그리운 대상이 되어버린 산은 더 이상 거대해 보이지 않았고 한없이 따뜻하게만 느껴졌다.

마치 꿈에서 깬 듯한 기분으로 이곳 저곳을 관찰하고 담기 시작했다.
다시 사진을 마주하는 마음이 들었던 순간이 그 시점이었고, 산에서 내려와 마을로 내려가는 도중, 길 위에서 마주한 시골매점 앞에서 잠시 발걸음을 멈추었다.
왜 낡아서 곧 쓰러질 거 같은 건물에서 아버지가 생각났을까.. 갑자기 그 세월 동안 견디고 살아있음에 감사하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잠시 멈춰있는 시간 동안 마주하지 못하는 그리움에 왈칵 눈물이 났다.
감정과 인내가 평행을 이루던 임계점(臨界點)을 지나 그렇게 한없이 그리워했다.

"길 위에 서다"는 그리움에서 시작된 아버지와의 관계이다.

사라져 가지만 아직은 현재와 관계하고 있는 나의 삶이자, 우리의 삶이다. 또한 사라져 가는 외형이 아닌 내면을 담은 기록이자 지극히 주관적인 시선이다. 언젠가는 그 시선으로 담았던 모든 것들이 사라질 수 있겠지만, 사진으로 존재하고 기록된다. 타임머신이라는 기계가 만들어지면 과거로 갈 수 있겠지만, 내면의 과거 여행은 "사진"이란 매개체로도 충분하다.

시선과 사진이 맞닿는 순간 평면의 사진은 마음을 요동치며 그리움이 담긴 피사체로 바뀐다. 미래의 누군가가 사진 앞에 서서 과거의 우리를 마주할 것이다.

그리워한다는 것은 살아있음이오, 살아있다는 것은 늘 그리움의 연속이다.

그 여름날의 감정이 그랬듯이. 아직 그리워할 대상이 존재함에 감사하며..
길 위에 서서 그리움을 담는다.


- 사진가 배지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