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형렬.Dig and Cover
2016년 8월10일 ~ 8월28일
갤러리 룩스
박형렬의 파노티시즘적 사진전술, 최연하(독립큐레이터) 풍경사진은 공간의 조직체계라는 차원에서 이해되어야만 한다. 그 공간을 누가 소유하고 있고 누가 이용하고 있는지, 어떻게 만들어졌고 어떻게 변형되었는지를 묻지 않으면 풍경사진의 의미를 알 수 없다. - J.B. 잭슨 풍경과 풍경을 조직하는 권력과의 관계를 사유해 온 박형렬이 여섯 번째 개인전, 주지하다시피 풍경사진에 기대는 보편의 정서는 낭만적이고 목가적이거나, 자연의 신비로움을 영구적으로 보존하는 시간을 초월하는 영역이 주를 이루었다. 그렇기에 자연을 변형시키거나 왜곡해서 촬영하는 것보다, ‘자연 그대로의 자연’ 풍경을 발굴해서 기존의 예술사적 모델에 맞게 보편의 규범을 찾아 촬영하는 것이 상례였다면, 박형렬은 ‘땅-풍경’을 통해 도시계획이나 건축, 부동산 경제와 지리학 등 땅과 인간과의 관계를 점검하는 일에서 그 가치를 찾고 있다. 인간이 땅에 행한 끝없는 ‘DIG AND COVER(파고 덥기)’에 의해 만들어진 역사적 구조물이 바로 '땅의 풍경(Land-Scape)'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사진에서 땅을 둘러싼 쟁점을 살피는 일은 중요해진다. 땅을 '캡춰capture'하고, '리마크remark'하고 땅의 '형세figure'를 보기 위한 박형렬의 작고 느리고 길고 반복적인 행위는, 기본적으로 땅의 속성에 닿아 있기도 하다. 그러한 행위를 통해 땅을 지배함으로써 영속을 꿈꾸는 인간의 욕망에 대한 ‘발언remark’을 시도하며 ‘수치figure’화 되어 온 땅의 형세를 멀리서, 가까이에서 다시 보게 하면서 땅을 다스려온 인간의 시각을 역설적으로 반영하고 있다. 좀 더 주목할 세목은, 그의 사진이 기존의 풍경사진이 지향하는 고상하고 아름답고 장대함을 갖춤과 동시에 문화적 텍스트를 강력하게 품고 있다는 것이다. 땅에 반영된 인간의 가치와 행동을 취사선택하고 재구성하여 하나의 텍스트를 이루고 있는데, 실상은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고 있다. 사진은 결코 말을 하지 않기에, 사진 속의 텍스트는 오로지 해독하는 자의 몫이라고 할 수 있다. 작가의 의도와 땅-풍경 사이에 얽혀 있는 의문들은 한 컷의 사진을 만들기 위한 그의 지난한 여정만큼이나 두텁다. 박형렬의 수행적 사진(performative photography)의 힘과 형식의 유희가 설득력을 얻게 되는 것도, ‘쓸데없는 짓’처럼 보이는 행위에 수고로움이 집적되어 있다는 것이다. 어쩌면 나약하고 무의미해서 무엇도 포획하지 못하고 발언하지 않는 것 같은 이 반복되는 유희는 우리가 경험하는 일상의 모든 시스템에 저항하는 전유의 방식이라 할만하다. 박형렬은 무의미한 '쓸데없는 짓'을 통해 자신이 경험하고 있는 상황과 사회적 풍경에 대해 다양한 질문을 제기하고 있다. 작가의 사소한? 유희가 ‘사건’이 되는 이유이다.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는 방식으로 은밀하게 자신만의 놀이를 고안해 냈는데, 그 메시지가 강력한 것도 같은 선상에서 이해된다. 그동안 버려진 화분들을 모아 공공의 장소에 자신만의 정원을 가꾸거나, 공터의 땅을 파거나 덮기를 반복하고, 때로는 비닐이나 천으로 땅을 감싸고, 실로 땅에 드로잉을 해 온 그의 사진 행위들은 미셀 드 세르토 (Michel de Certeau)가 말한 ‘전술trace'이나 ’쓸데없는 짓 하기faire de la perruque'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의 시선은 도시공간에 일상화된 CCTV의 시각처럼, 높은 곳에서 관찰하는 타자의 시선이다. 파놉티콘적 근대 권력의 전략을 벗어나는 미시적 실천들을 탐구할 수 있는 이론적 방법론과 실례를 제시해 온 세르토가 근대 권력의 작동 방식으로 제시하는 파놉티시즘(panopticism)은 제레미 벤담의 파놉티콘 원리에서 가지고 왔다. 크레인을 타고 높은 곳으로 올라가 대상을 바라보고, 판별하며, 공간을 구획 정리하며 촬영한 박형렬의 시각은 응시의 대상이 되는 모든 행위들을 담론의 대상으로 구성하며 조직하는 시선이라 할 수 있다. 박형렬은 자신을 대상과 분리시켜, 대상에 대한 지식을 새롭게 구성하고자 하는 시점(view-point)의 중심에 스스로를 위치시킨다. 이러한 조망은 오늘날 ‘땅따먹기’를 하는 도시계획자의 시선과도 중첩된다. 땅을 앎의 대상으로 설정하고 이에 대한 지식을 축적함으로써 땅을 포섭해 온 근대 권력의 시선인 것이다. 르네상스 이후 공간의 합리적 재현기법이라 할 수 있는 선원근법을 잘 구현한 카메라의 시점처럼, 파놉티콘의 형태로 수렴해낸 박형렬의 풍경-전술은 이 지점에서 중요해진다. 파놉티콘적 응시는 모든 것을 감독하고, 타자의 공간을 대상화하고 담론화해 온 권력의 시선이자, 그간 땅을 점유해 온 자본의 파놉티시즘적 작동원리이기 때문이다. 자본의 권력에 맞서 일상의 보이지 않는 실천을 통해 자본과 권력에 포섭되지 않는 어떤 가능성에 주목한 세르토의 전술처럼, 박형렬은 땅위에 새로운, 무모한 지도를 그리며 부드러운 저항을 시도한다. 권력의 원근법이 도시를 구획한다면, 박형렬의 파놉티시즘적 시각은 마치 ‘훈육을 피하기 위해 훈육이 행사되는 밖으로 나가지 않으면서 다양한 형태, 저항, 고집스러운 조치들을 추적하여 일상적 실천과 체험의 공간, 도시의 불안한 친숙성에 관한 이론을 전개하고자 한다.”는 세르토의 실천의 영역에 닿아있다. 땅을 찾아 긴 시간을 헤맨 그에게 사람의 관리에서 벗어나 있거나, 사람으로부터 버려진, 그래서 폐허가 된 공터는 매혹적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땅과 조우(encounters)하고 땅을 연결(connections)하고, 그리고 사유의 선(line of thought)을 접고 펴는 것을 유도하여 또 다른 되어감(another becoming)과 도주선(line of flight)을 촉구하고 있는 그의 땅-풍경 사진은 확실히 견고한 탈주를 보여주고 있다. 특히 인간과 땅의 이질적인 관계들을 구축함으로써 본질보다는 정황과 상황을 제시하며 사진과 설치, 조각과 퍼포먼스를 넘나들고 그 중간-중간의 의미들을 놓치지 않고 있는 점은 박형렬 사진의 특장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느리고 긴 여정은, 자본주의 질서 자체를 드러내면서 그 배치를 어떻게 바꿀 수 있을까(결코 바뀌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 관계망에 대한 색다른 고민을 윤리적이고 미학적인 방식으로 풀어내며 새로운 풍경사진의 가능성을 예고한다. |
박형렬 Hyong-Ryol BAK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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