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각과 회화, 사진이 결합된 독자적 인물화 작업으로 알려진 박대조의 개인전 ‘Where do we go now?’가 갤러리 나우에서 개최된다. 이번 전시는 대리석 위의 음각과 먹, 아크릴 등을 이용했던 이전 작품을 비롯해, 그래픽 이미지로 전환된 사진 이미지를 비단 위에 다시 그려 넣고 뒷면에 LED조명을 첨부한 근작까지 그간의 박대조의 시도와 도전을 집약한 15점을 선보인다. 작가는 의도치 않아도 쉽게 직면하게 되는 현세계속의 묵시적 폭력성을 철모르는 아이의 눈동자 속에 직접 대면시킴과 동시에 동시대의 주체이자 주제인 아이의 무표정을 통해 현시대를 살아가는 어른들을 향한 비판적 역설로 그 절박함을 전하고 있다. 독특한 재료만큼이나 섬세하고 세련된 완성기법, 묵직한 메시지 뒤에 담겨진 현상(現狀)에 대한 작가의 예술관과 직면할 수 있는 이번 전시는 오는 4월 1일부터 14일까지 이어진다.
갤러리 나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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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 노트 ]
…내면은 텅 비고 삭막하고 고통스러운 현대인의 삶. 현대인의 정체성과 실존 의문에서 출발한다. 사라지고 생기고 보고 보이고... 나는 너와 별개가 아니고 세계는 관계하며 공존한다. 현대인의 존재 물음부터 개인 혹은 사회 부조리에서 비롯된 갈등과 인간욕망에 의해 상처 입은 자연과의 관계모색을 나타내려 한다. 노장(老莊)사상의 “무위자연(蕪爲自然)”은 자연의 이치를 깨달아 자연과 조화 스러운 삶을 영위하려는데 목적이 있다. 본인의 작업은 이러한 “자연으로의 회귀와 自然과 인간의 合一된 세계인 천지인합일(天地人合一)적 본능의 바탕에서 시작된다. 인간의 삶은 자기를 둘러싼 주변 조건들과 자기 내부의 깊은 곳으로부터 발생하는 근원적인 의문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과 해답을 추구하는 힘든 노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한 과정에서 인간 실존의 깊은 의미와 근원적 생의 의미를 확대 심화시켜 나아가는 것이다. 하지만 어느 때부터인가 나는 그러한 본질적인 의문에 대한 해답은 고사하고 질문을 던지는 것조차도 포기해버린 것 같다. 내게 있어 작품 활동은 자기 내부와의 끊임없는 대화와 자연과의 지속적인 반응과 소통을 통해서 깨달을 수 있는 삶의 철학인 것이다. 인간의 삶은 시간 속에 존재한다. 제각기 다른 삶은 인간의 개성을 낳고, 그 개성은 창조력의 근원이 된다. 기다리며, 시간은 그렇게 지나가는 것이다. 어렵고 힘든 인간의 삶도 이러한 하루하루의 시간 속에서 영속적으로 이어진다. 나는 이러한 시간 속에서 하루의 가치를 생각하며 그림을 그린다. 이것은 삶의 리얼리티이다. 돌은 이러한 인간의 시간을 자연에 새겨놓은 화석이다. 억겁의 시간 동안 조용히 잠들어 있던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들을 조용히 관망하던 동심을 현실 세계로 끌어와서 나를, 인간을 그려 넣는다.
박대조 - 돌의 피부에 서린 천진한 얼굴
박영택(경기대교수, 미술평론)
수묵을 이용한 산수화와 대리석이 지닌 자연적인 무늬와 색상을 이용, 그 무늬의 결을 따라 산수이미지의 자취를 쫓던 것이 박대조의 그간의 작업이었다. 그러나 근작은 이전과는 무척 다른 지점에서 전개되고 있다. 그는 필에 의한 그리기와 대리석이란 오브제를 이용한 작업 대신에 사진을 활용하고 있다. 사진이란 레디메이드와 돌이란 오브제를 쓰고 있는데 그 사진을 대리석 표면에 독특한 장치로 올려놓고 연출해 새로운 장면, 상황을 만들어내고 있다. 사진은 하나의 회화 재료로 구사되고 있고 대리석/돌이란 재료, 표면은 여전히 매력적인 물질이자 그만의 작업언어와 방법론으로 기능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사진이미지와 회화의 접목, 그리고 이를 돌/돌의 피부 위에 올려놓아 독자한 사진 상태를 흥미롭게 전개하고 있다는 점이 주목된다. 그것은 일반적인 사진프린트기법에서 벗어나 사진오브제, 혹은 사진의 물질화, 조각화라는 새로운 지점으로 나아간다.
그는 어린아이의 얼굴을 촬영한 후 이를 확대했다. 아이들은 커다란 눈을 뜨고 우리를 바라본다. 아이의 커다란 눈이 전면적으로 다가온다. 티없이 맑고 순수한 영혼이 아이의 얼굴 표정에 드리워져 있다. 보는 이의 시선이 그 아이의 시선과 일치하는 지점에 놓여진다. 흑백의 사진에 들어온 이 얼굴, 커다란 눈동자는 침묵 속에 우리를 응시한다. 익명의 아이들 눈동자에는 또 다른 장면이 개입되어 있는데 크게 두 가지 종류의 이미지가 그려져 있거나 콜라주되어 있다. 우선 전쟁이나 공포스러운 상황을 암시하는, 다분히 종말론적이고 세기말적인 상황을 암시하는 풍경이 그것이다. 전세계적으로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는 전쟁과 테러, 생태파괴와 환경오염 등을 보여주는 이미지는 어리고 착한 아이의 눈에서 불꽃처럼, 섬광처럼 분출한다. 단색 톤의 사진이미지에서 유독 그 부분만은 강렬하게, 눈에 띠는 색채를 지닌 체 박혀있다. 티없이 맑은 얼굴로, 무방비로 다만 그 장면을 고요함 속에서 바라보고만 있는 아이의 심정과 내면을 관자들로 하여금 유추케 한다. 어른의 세계가 저지른 비극과 참화를 아이들은 다만 바라볼 뿐이다. 그러나 그로인한 대가와 피해는 고스란히 이 아이들의 어깨에 내려앉아있다.
한 축으로는 그와 상반된 이미지들이 스며들어있다. 밝고 긍정적이며 낙관적인 미래에 대한 은유적인 이미지가 그것이다. 극단적인 세계상, 현실상황이 아이들의 눈동자 안에서 번갈아 일어나고 있는 셈이다. 눈동자의 홍채 대신에 스며든 이 이미지들은 마치 눈동자에 비친, 아이들이 바라보고 있는 바로 앞의 장면을 투사하는 한편 아이들에게 닥친 비극적, 긍정적 세계상을 보여주는 가공의 풍경연출이다. 그에게 사진이란 작업 주제를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이미지를 재현해주는 한편 현실상황을 강하게 암시하는 매개로 활용된다. 현대 사회의 여러 모순과 현실적인 문제의식을 날카롭게 비판하고 들추어내기 위한 효과적인 오브제이미지로 사진이 개입된다. 동시에 흑백사진이미지는 수묵에 익숙한 그에게 그와 유사한 미감으로 연결된다.....(중략)
돌은 영속성과 굳건함, 아득한 시간의 결들을 함축하고 있는 물질이다. 그 물질이 연약한 아이의 얼굴과 눈을 담고 있다. 사실 인간의 연약한 살과 유한한 목숨을 돌 위에 그리는가 하면 아예 돌 자체에 각인하고자 한 것은 유한한 인간의 삶, 소멸의 두려움을 돌로 극복하고자 했던 욕망을 말한다. 그것이 이미지의 기원이었을 것이다. 박대조는 새삼 그 재료와 사진이미지를 결합해서 새로운 화면을 만들었다. 동양의 전통사상과 재료의 흔적에 첨단의 방법론이 결합되어 이룬 작업인데 그 안에 천진한 아이의 얼굴/눈에 현대문명으로 인해 초래된 참화와 공포를 담담히 비추어내고 있다. 서늘한 돌의 피부가 그 장면을 영원히 각인하듯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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